교회가 태중의 아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낙태 문제는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정치적인 이유로 최근에 만들어 낸 현대적 논쟁일 뿐이라는 말 말입니다.
우리 시대만 보고 맥락을 무시한다면, 그 이야기는 거의 사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시간을 1세기로 되돌려 보면, 초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태아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자녀를 집안의 재산처럼 여겨 팔거나, 낙태하거나, 내다 버릴 수 있었던 로마 세계에서 태어났고, 제국 안에서 그것을 문제 삼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계를 되돌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태어난 그 세계를 살펴보고, 그들이 주변 문화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고자 합니다.
로마 세계의 일반적인 사고방식
로마 세계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권리 논쟁이 없었습니다. 가정의 권리가 있었고, 로마법은 여전히 자녀에 대한 권리를 아버지의 손에 맡겼습니다. 한 집안의 아버지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 곧 “아버지의 권력”이라 불리는 법적 권한을 가졌습니다. 옛 법에서는 이 권한에 자녀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국 시대에 이르러 그 극단적인 권리는 일상적인 관행이라기보다 권력의 상징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있는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곧 자녀는 아버지에게 속하며, 어머니의 뜻과 상관없이 아버지가 그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가장 흔한 일은 갓난아기를 남의 집 문간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아이, 가난한 집 아이, 장애가 있는 아이, 사생아는 특히 이 잔인한 운명에 취약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유기(exposure)”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아기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어떤 아기들은 노예로,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처지로 거두어졌습니다. 로마법은 이것을 살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범죄가 아니라 익숙한 문화적 관습이었습니다. 일부는 그것을 비인간적이라고 했지만, 세상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을 때 유기는 흔한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출생 전에는 아이의 건강이나 성별을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아는 태어난 뒤에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전혀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낙태가 하나의 선택지였습니다. 고대 의학 저술가들은 진행 중인 임신을 중단시키는 데 쓰인 여러 약물을 기록했습니다. 페니로열, 루타, 몰약, 분출오이(Ecballium elaterium), 시클라멘 등 수많은 “약”이 낙태에 사용되었지만, 가장 유명한 예는 실피움입니다. 의사 소라누스는 키레네의 유명한 향신료이자 약재인 실피움의 즙을, 어떤 이들이 임신을 막거나 이미 잉태된 것을 없애는 데 사용한 물질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부인과학』 63). 피임제, 낙태제, 최음제로 작용하는 그 효능 때문에 실피움은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이 식물은 너무나 값지고 널리 알려져서 키레네는 그것을 자기 동전에 새겨 넣을 정도였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던 무렵, 대(大)플리니우스는 키레네에서 실피움이 너무 희귀해져 그곳에서 발견된 마지막 줄기가 네로에게 보내졌다고 기록합니다(『박물지』 19.15). 실피움은 1세기 말에 이르러 남획으로 멸종했지만, 다른 낙태 방법들은 남아 있었고, 로마 제국에서 낙태는 여전히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흔히 행해지는 일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했던 세상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중립적인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낙태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낙태는 합법이었고, 상품으로 팔렸으며, 사회적으로 용인되었고, 실제로 널리 행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해 무엇을 했을까요? 무언가를 말했을까요, 아니면 침묵했을까요?
초대 교회의 가르침
우리는 성경이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출생 이전의 인간 생명과 그 보이지 않는 가치를 엿보게 해 줍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시편 139:13-14).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예레미야 1:5).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갔을 때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누가복음 1:41). 이 말씀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함께, 여섯째 계명이 생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초대 교회에 가르쳐 주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태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교리 교본 가운데 하나는 『디다케』입니다. 『디다케』는 첫머리에서 자신을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사도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복음을 전하며 직접 가르친 내용이기에 교회가 한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르침들을 모은 것입니다. 이 문서는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던 1세기 말경, 교회의 사도적 기준을 보존하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평범한 신자들이 각자의 회중 안에서 당대의 문제들에 대해 이미 무엇을 배우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창문과 같습니다.
『디다케』는 알려진 세계 곳곳의 여러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서 회람되었고, 그 가르침이 반복되고 후대의 교회 교본을 만드는 데 사용될 만큼 영향력이 컸습니다. 기록된 지 수세기가 지난 뒤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여전히 이 문서를 알고 있었고, 자기 교회에서 나누었으며, 교리를 가르치는 데 유익한 자료로 여겼습니다.
『디다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로 울리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하나는 죽음의 길이다. 이 두 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곧이어 교회의 규범을 제시하기 시작하면서, 살인을 금하는 계명과 같은 호흡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낙태로 아이를 죽이지 말며, 태어난 아이도 죽이지 말라”(디다케 2.2). 낙태와 유기로 갓난아기를 죽이는 일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둘은 같은 죄로 여겨졌기에 같은 계명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교회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낙태 반대 입장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반문화적 운동이었습니다.
『디다케』는 뒤의 한 단락에서 죽음의 길을 열거하면서, 다시 한번 “아이들을 죽이는 자들, 하나님의 작품을 파괴하는 자들”을 죽음의 길에 참여하는 자들 가운데 포함합니다(디다케 5). 태중의 아이는 생물학적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로마의 가정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없앨 권리가 없습니다. 『바나바 서신』도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하며, 이 주제는 사도 교부들 사이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은 곧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문화가 점잖아지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회심자들에게 처음부터, 낙태에 대한 세상의 입장은 분명히 죽음의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따르는 자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부들의 증언
『디다케』의 그 첫 금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뒤이은 교회 지도자들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사도 바나바가 썼다고 알려진 『바나바 서신』은 이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초대 교회는 이 글을 성경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바나바가 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나바 서신 19:5에서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낙태로 아이를 죽이지 말며, 태어난 후에도 그 아이를 죽이지 말라.”
아테나고라스는 주후 177년경 로마 황제들에게 직접 글을 써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탄원』 35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인자라는 고발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낙태를 일으키려고 약을 쓰는 여인들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며 그 낙태에 대해 하나님께 해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가, 무슨 원리로 살인을 저지르겠습니까?” 아테나고라스는 로마 문화와 철학에 깊이 뿌리내린, 믿지 않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말할 때조차 교회의 공식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낙태는 살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주후 197년경 이를 더욱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살인이 단번에 영원히 금지되어 있으므로, 사람이 아직 어머니 몸의 다른 부분에서 피를 받아 영양을 얻고 있는 동안에도 태중의 태아를 죽여서는 안 된다. 출생을 막는 것은 더 빠른 살인일 뿐이다. 태어난 생명을 빼앗든, 태어나려는 생명을 죽이든 다를 바 없다. 장차 사람이 될 존재는 이미 사람이다. 열매는 이미 씨앗 속에 있다”(『호교론』 9:8).
역사의 흐름을 따라 계속 내려가 보면, 낙태가 잘못이라는 교회 지도자들의 일관된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이 낙태를 명시적으로 금하지 않는다면, 왜 초대 교회는 기독교를 세상에 전하면서 그토록 강한 반문화적 입장을 취했을까요? 『디다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도가 낙태는 살인이라는 데 동의하고 그렇게 전했습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만장일치의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어느 때인가 이 문제를 그들과 이야기하셨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이것은 논쟁거리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언제나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순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도 짓지 않는 죄에 대해 교사들이 글을 쓰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그것이 분명한 가르침이었음에도, 어떤 이들, 특히 비유대 문화에서 교회로 들어온 이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것이 지난 한두 세대 사이에 우리 신앙의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할까요? 무언가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1973년 이전까지 미국의 공식 입장은 낙태가 잘못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화가 어떤 것이 잘못이라고 말해 줄 때에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 많이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이후 논의의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문화적 기준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낙태 폐지론자가 된다는 것은 다시 한번 반문화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생명의 길
『디다케』는 두 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 길은 아이를 관리해야 할 문제로 여깁니다. 그 길은 오래되었습니다. 로마에서도 흔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다른 길은 아이를 이미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는 피조물로, 그분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으로, 우리가 이미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처음 로마 세계로 걸어 들어갔을 때 그 길은 낯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하십시오. 교회는 이 믿음을 어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그 기준을 어떤 점잖고 도덕적인 고대 문화에서 빌려 온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계산을 거부하십시오. 태중의 아이는 방해물이나 불편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가고 계신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이며, 살아 있는 인격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어머니를 돕지 않는다면, 세상이 태아에게 하는 일을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잊지 맙시다. 살인을 금하는 바로 그 『디다케』는 또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궁핍한 자를 외면하지 말고, 네 형제와 모든 것을 나누라”(디다케 4.8). 그러니 알지 못하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맺음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주변 세상과 다른 길을 택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모든 인간 생명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이라면, 편리함도, 두려움도, 가난도, 문화적 용인도 그 생명에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앞에 놓인 선택입니다. 우리는 낙태가 단지 우리의 정치나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해야 합니다.
이 글이 이 주제에 대한 답을 찾는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에 놓인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분이 있다면,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알 수 없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왜 애굽에 팔려 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에서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오래 도망 다녀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들의 입이 막힐 줄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는 두려움이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모든 일 가운데서 건지셨고,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 당신의 이야기도 그렇게 될지 모릅니다.


